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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세 때 책 얻어다 공부 시작, 49세에 9급 공무원에 합격
"언제든 이웃 도울 수 있게 작업복·공구 안 버릴 겁니다"

리모델링 공사를 하던 집 거실에 집주인의 딸이 공부했던 고교졸업 검정고시 문제집이 있었다. 바닥에 펴놓고 배달해온 짜장면을 먹으며 몇 문제를 풀어볼 수 있었다. 당시 35세였던 정천조(49·전북 전주시 덕진구 우아동)씨는 주인에게 말해 그 책을 얻어왔다. 가장(家長)으로 건축 현장에서 막노동을 하고 파김치가 돼 돌아왔지만 밤이면 공부에 매달렸다. 1년 만인 1999년 그는 고졸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거푸집과 슬라브틀을 만드는 '형틀 목수'가 돼 벽돌을 져 나르는 막노동에서 벗어나게 되자 대학까지 졸업하고 싶었다. 2002년 방송통신대 법학과에 입학해 4년 만에 졸업할 수 있었다. 땀에 젖어 일한 뒤 거의 매일 자정 넘어 잠자리에 들었고 새벽 5시면 무거운 눈꺼풀을 부비며 일어났다. 주택관리사, 공인중개사, 한자능력1급, 고압가스·공조냉동기능사 등 15개의 자격증도 따면서 우수한 성적을 내 졸업식 때 총장상을 받았다.

건축 노동자로 전북 전주시청 9급 공무원에 합격한 정천조씨가 합격 통보를 받은 다음날인 22일 전주시내의 한 원룸 신축 현장에서 작업 중이다. /김창곤 기자
방통대 졸업 6년 뒤인 지난 21일 정씨는 전북도 사회복지 9급 공무원 임용시험에 최종 합격했다. 19대 1(전주시 임용 지원)이나 된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다는 소식을 그는 전주시 덕진구 팔복동 원룸 신축 현장에서 들었다. 2008년부터 2년 동안 야간 대학원을 다니며 사회복지사 1급 자격증을 딴 뒤 2년 동안 주경야독으로 공무원 시험공부를 해 온 결과였다. 그의 눈에 눈물이 돌았다. 함께 비계 위를 오르내리던 동료들은 "세상에 이렇게 기쁜 일이 있나"며 축하해줬다.

"행운이었습니다. 늦게나마 못했던 공부를 하다 보니 길이 열렸고, 새 목표들도 세웠습니다."

이른 봄 산수유로 꽃동네를 이루는 전남 구례군 산동면에서 태어난 그는 홀어머니 아래에서 고교 1년을 마치고 공장 심부름꾼으로 일하다가 군 제대 후 막노동을 했다. 건설현장을 떠돌면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늘 부러웠다.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았지만 미련이 남아선지 신문이든 책이든 닥치는 대로 읽었다.

작업을 마친 뒤나 눈·비 등으로 일이 없는 날이면 동료들은 술과 고스톱에 젖어들곤 했으나 그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공사장 부근 수돗물로 먼지와 땀이 범벅된 머리를 감고 자신의 차 안에서 옷을 갈아입은 뒤 학교로 향했다. 동료 노동자들은 '별난 사람'이라 하면서도 새벽 6시 반이면 어김없이 공사현장에 나오는 그를 응원해줬다.

그는 "고단했지만 늘 시간이 모자랐다. 차를 몰며 테이프로 강의를 듣고 영어단어도 외웠다"고 했다. 대학 4학년 때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료급여법 등을 공부하며 자신보다 어려운 처지의 이웃들을 위해 일하고 싶어 대학원에서 사회복지를 전공했다고 했다.

"곧 깨끗한 옷을 입고 동사무소로 출근하겠죠. 그러나 작업복과 공구들은 차 안에 그대로 둘 거예요. 주말과 휴일에도 언제든 어려운 집에 달려가야 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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